▲ ‘조주록’ 등에서 공안 100개를 뽑아 각 공안에 게송을 붙인 ‘설두송고’에 대한 원오 선사의 선적인 설법을 정리한 책이 ‘벽암록’이다. 중국 백림선사에 있는 조주 스님 사리가 봉안된 조주탑.

선종(禪宗) 제일의 서책이라 불리는 ‘벽암록(碧巖錄)’은 예부터 선 수행자들이 매우 중시해 온 공안집이다.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 선사가 찬술한 ‘벽암록’의 출현 배경을 짚어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송고’라고 하는 선의 새로운 경향부터 알아야 한다. ‘송고(頌古)’란 고칙(古則)에 대한 게송(頌)이라는 뜻이다. 고칙은 곧 공안(公案)을 말한다. 따라서 ‘송고’란 공안에 대해 자신이 꿰뚫은 경지를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운문종 중흥조 설두 선사
‘전등록’ 등 100칙 공안 선별
경지 읊은 ‘설두송고’ 간행

원오 선사, 제자들 요청에
‘설두송고’ 선적으로 설파
선종 최고의 ‘벽암록’탄생

공안·게송에 촌철살인 한마디
선 수행자들 선기 격발시켜
참선 위한 최고 지침서 평가

조사들의 전기나 어록에서 수행 상의 모범이 될 만한 언행을 뽑아 놓은 것을 고칙 또는 공안이라 한다. 공안은 쉽게 말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 할 시험문제이다. 공안에는 진리가 그대로 나타나 있으나, 상식과 지식의 잣대로는 아무리 공안을 보아도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는 공안을 직접 참구하여 마침내 꿰뚫어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이다. 공안을 화두(話頭)라고도 하는데 이 둘을 구분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특정한 공안에 게송을 붙이는 송고의 풍조는 당나라 중기 무렵부터 시작된다. 당나라 말 이후 송고를 저작하는 풍조는 오가(五家)라 불리는 선종의 각 파, 곧 위앙종·임제종·조동종·운문종·법안종에 공통된 경향으로 정착되었다. 이 송고의 금자탑을 이룬 것이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사의 송고백칙, 곧 ‘설두송고(雪竇頌古)’이다.

운문종의 중흥조라 불리는 설두 선사는 조사들의 전기를 기록한 ‘경덕전등록’이나 어록인 ‘운문광록’, ‘조주록’ 등에서 공안 100개를 뽑아 그 각각에 송을 붙였다. 이것을 정리하여 출간하니 그 책 제목이 ‘설두송고’이다. ‘설두송고’는 그 질과 내용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설두송고’가 세상에 나온 이후 50~100년이 흐르는 사이 ‘설두송고’를 거치지 않고는 선문(禪門)에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벽암록’의 찬술자 원오 선사도 그의 나이 25세 무렵에 이미 ‘설두송고’를 배웠다.

설두 선사의 뒤를 이어 많은 저명한 선사들이 송고백칙(자신이 선별한 100칙의 공안에 게송을 붙인 것)을 남겼다. 송고의 수가 이렇게 비약적으로 늘어나자 저명한 송고를 총괄하여 모아 놓은 송고집도 여러 권 나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송고집이 편찬되었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뒤를 이은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이 1226년에 편찬한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 그것이다. 1125칙에 달하는 공안에 대한 송고 등을 모아서 간행한 것이다. ‘선문염송집’은 우리나라 전통 강원의 필수 과목으로 일찍부터 채택되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시행된 선종 승려들을 위한 과거시험인 선종선(禪宗選)에서도 이 책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점검하도록 되어 있었다.

송고가 이렇게 성행하다보니 당연히 송고에 대한 제창(提唱, 선적인 설법)도 요구되었다. 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원오 선사의 ‘벽암록’이다. ‘벽암록’은 참선을 위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 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조주탑 ‘특사대원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탑(特賜大元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塔)’.

‘벽암록’은 북송(960~1127) 초기에 설두중현 선사가 저술한 ‘설두송고’에 대해 북송 말기에 원오극근 선사가 제자들의 요청에 응하여 제창한 것을 정리해서 펴낸 것이다. ‘벽암’이라는 제목은 원오 선사가 머물던 협산(夾山, 지금의 호남성 예현에 소재) 영천원(靈泉院)에 걸려 있던 현판 속의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왜 하필 ‘벽암’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나라 시대 바로 이 협산에서 선풍을 드날린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 선사가 ‘벽암’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게송을 남겼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협산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협산의 경지입니까?’ 협산 선사가 읊었다. ‘원숭이는 새끼를 품에 안고 높고 험한 푸른 산 뒤로 돌아가고, 새는 꽃을 물어다 푸른 절벽[碧巖] 앞에 떨어뜨린다.’”
협산 선사가 읊은 협산의 경지, 곧 ‘깎아지른 푸른 절벽(벽암, 碧巖)’에서 선 수행자의 번뜩이는 시퍼런 선기(禪機)가 느껴지지 않는가?

‘설두송고’는 100개의 공안인 본칙(本則)과 그 각각에 대한 설두 선사의 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두송고’가 나오고 약 100년이 지났을 때, 임제종 양기파의 원오 선사는 ‘설두송고’의 본칙과 송에 수시(垂示)와 착어(著語), 평창(評唱)을 달았다. 이것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 ‘벽암록’이다.

‘벽암록’ 의 구성은 각 본칙 바로 앞에 수시가 있고, 이어서 본칙과 이에 대한 착어와 평창, 송과 이에 대한 착어와 평창의 순서로 되어 있다. ‘벽암록’ 본칙(本則)은 위에서 말했듯이 설두 선사가 자신의 안목으로 가려 뽑은 ‘설두송고’ 속 100칙의 공안이다. 수시(垂示)는 원오 선사가 본칙을 시작하기 전에 수행승들에게 선의 요체를 들이대며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 분발시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본칙 바로 앞에 붙어 있으며 모든 본칙에 다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착어(著語)는 본칙과 송의 각 구절에 붙인 짤막한 코멘트이다. 그 구절을 칭찬하거나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구절에 응답하거나 경지를 발전시키기도 하면서, 냉소와 질타, 풍자와 독설로 문제의 핵심에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 원오 선사의 탁월한 선적 역량이 나타나 있으며, 문맥 없이 짧은 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난해하다. 그래서 이 촌철살인의 착어는 선 수행자들의 선기를 격발시키는 ‘용의 눈’과 같다는 평을 받아 왔다.

평창(評唱)은 본칙과 송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다. 주로 등장인물에 관한 일화나 본칙과 송의 배경이 되는 고사, 그리고 본칙과 송에 나오는 구절을 보는 바른 안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문적인 서술이어서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물론 이 평창의 목적도 본칙과 송의 정곡을 꿰뚫게 하는 데 있다.

‘벽암록’ 100칙의 공안에는 간행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제목이 붙여졌다. 제1칙의 제목도 ‘무제가 달마에게 묻다(武帝問達磨)’ ‘성스럽고 근본적인 진리(聖諦第一義)’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廓然無聖)’ ‘달마가 모른다고 하다(達磨不識)’ 등 여러 가지이다. 여기서는 여러 간본 중에서 본칙의 내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제목을 선택해서 쓰기로 한다.

‘설두송고’의 저자 설두중현 선사는 사천성 수주(遂州) 출신이다. 속성은 이씨이며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책을 읽고 글을 짓는 데 뛰어났다. 20살 전후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경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현묘한 이치를 궁구했다. 질문을 할 때는 예리하기 그지없었고, 진리를 말할 때는 당할 자가 없었으므로 그가 법기(法器)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 후 눈 밝은 선의 스승을 찾아 나섰다.

운문종의 지문광조(智門光祚, ?~1031) 선사를 찾아갔을 때이다. 수행승 설두가 지문 선사에게 물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데 무슨 허물이 있습니까?” 지문 선사는 가까이 오라고 했다. 설두가 다가서자마자 지문 선사는 갑자기 불자(拂子)로 정면으로 내려쳤다. 설두가 입을 열려는 순간, 지문 선사가 또다시 내려쳤다. 이 순간 설두는 활연히 깨달았다. 마침내 설두 선사는 지문 선사의 법을 잇게 되었다.

운문종을 개창한 운문문언 선사의 4세손인 설두 선사는 운문종의 종풍을 크게 드날리며 많은 제자를 길렀다. 만년의 설두 선사의 문하에 모인 수행자는 15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운문종의 중흥조라 불리며 명각대사(明覺大師)라는 호도 하사 받았다.

그의 법호가 설두인 것은 그가 명주(明州, 지금의 절강성 봉화현)의 설두산에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인 1021년에 들어와서 입적할 때까지 31년간 줄곧 이 산에 머물렀다. 그가 머문 설두산 자성사(資聖寺)는 송대 10찰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설두 선사가 활약한 송나라 초기는 운문종이 번성하여 불일설숭(佛日契嵩, 1007~1072) 선사 등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시기였다. 그러나 남송 시대(1127~1279)가 시작되면서 임제종이 대두하여 마침내 중국 전역을 평정한다.

설두 선사에게는 7집이라 불리는 7종의 저술이 있다. 이 가운데 그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단연코 ‘설두송고’이다. 설두 선사가 그의 송고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천희(天禧) 연간(1017~1021)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완성은 그가 설두산에 들어오고 난 후인 천성(天聖) 연간(1023~1031)에 이루어진다. 그의 나이 44세에서 52세 사이의 일이다.

그렇게 찬란했던 ‘설두송고’에 대한 평가는 원오 선사의 ‘벽암록’ 출현에 의해 일변한다. ‘벽암록’이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 불리며 크게 유행하는데 반해, ‘설두송고’를 보는 사람은 드물어지고 급기야는 대장경에도 실리지 못했다. 금일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설두송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벽암록’ 속에서 원오 선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그의 송고를 볼 뿐이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