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휘옥·김사업이 쓰는 '벽암록'>



3. ‘벽암록’ 어떻게 읽어야 하나



"말이나 문자 얽매인다면 필시 부처 명맥이 말살되리니"



                                               장휘옥·김사업 |www.ogokdo.net



(승인 2015.01.12 16:52:02)

▲ 원오 선사의 ‘벽암록’은 선 수행자들의 선기(禪機)에 불을 붙여 간화선 수행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대단한 폭발력이 있다. 하지만 ‘벽암록’을 흉내 내 깨달은 척하는 사이비 선승들도 출현시켰다. 대혜 선사가 스승 원오 선사의 ‘벽암록’을 불태운 것도 이 책의 내용을 외우고 깨달은 척하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진은 대혜 선사가 머물렀던 경산사.

‘벽암록’의 저자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 선사는 사천성 팽주(彭州) 숭녕(嵩寧) 사람이다. 숭녕은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인근이다. 북송의 휘종은 그에게 불과(佛果)라는 호를 주었고, 남송의 고종은 원오라는 호를 하사했다. 이렇게 생전에 두 번이나 호를 받았고, 입적하고 난 뒤에는 진각(眞覺)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원오, 교학에서 선으로 전환
오조법연 회상서 큰 깨달음
“우리 종문 멸할 이는 원오뿐”
법연, 원오 심오한 경지 극찬

원오 제창 정리해 ‘벽암록’ 출간
임제종 번성 이끌었던 원동력

1128년 ‘벽암록’ 서문 쓴 보조
사이비 선승 출현할 것 경고
대혜에게 소각되는 비운 겪어
체험 없으면 ‘그림 속 장공자’
 

▲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 선사는 대혜종고, 호구소륭 등 걸출한 선승 100여 명을 배출해 임제선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토대를 튼튼히 했다.

원오 선사의 속성은 낙(駱)씨, 대대로 유학자인 가문에 태어났다. 그의 용모는 ‘서로월면(犀顱月面)’, 곧 두상은 무소를 닮았고 얼굴은 달과 같아서 범상이 아니었다. 어려서 글을 배울 때부터 동료들이 감히 견줄 수 없는 수재였다. 하루는 묘적사(妙寂寺)에 놀러 갔다가 불교책을 보고 이를 읽기를 세 번, 마치 예전의 물건을 손에 넣은 것 같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과거에 나는 출가사문이었나 보다” 했다.

마침내 그 절에서 출가하여 성도로 나가 당시의 뛰어난 스님들에게서 ‘능엄경’ 등 경론을 배웠다. 우연히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큰 병을 앓고서 지금까지 배워온 교학만으로는 생사를 해탈하는 힘이 없음을 한탄했다. 병에서 회복하자 경론을 버리고 선의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를 지도한 선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그릇을 인정했다. 특히 임제종 황룡파의 회당조심(晦堂祖心, 1025~1100) 선사는 언젠가는 임제종이 그에게 속할 것이라고 격찬했다. 수행승 원오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은 임제종 양기파의 오조법연(五祖法演, ?~1104) 선사였다.

원오는 이전에 이미 깨달은 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법연 선사 앞에서는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법연 선사는 조금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고 원오를 지도했지만 수행에 큰 진척이 없었다. 마침내 원오는 불손한 말을 하고 화를 내며 법연 선사 곁을 떠나려 했다.

법연 선사가 말했다. “이곳을 떠나 절강성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열병을 앓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를 생각하겠지.” 과연 원오는 열병에 걸렸고 스승의 말씀을 돌이켜 보고는 다시 스승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뒤 보름이 지났을 때 수행승 원오는 마침내 생사를 해탈하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법연 선사의 문하에는 삼불(三佛)이라 불리는 뛰어난 제자 셋이 있었다. 세 명의 법호에 모두 부처 불(佛)자 들어갔기에 그렇게 불렀다. 불감혜근(佛鑑慧懃, 1059~1117), 불안청원(佛眼淸遠, 1067~1120), 불과원오(佛果圜悟, 1063~1135)가 그들이었다.

어느 날 밤 법연 선사가 정자에서 이 세 사람에게 법을 설한 뒤 돌아오려고 했을 때였다. 하늘에는 달도 없고 등불은 이미 다 타 버려 천지가 캄캄했다. 법연 선사는 지금 눈앞에 있는 캄캄한 어둠에 대해 한마디씩 해보라고 불현듯이 제자들을 다그쳤다.

법연 선사가 불시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즉각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일상생활 한가운데서 각자의 수행과 경지를 가늠해 보는 동시에 깨달음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선이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 주는 한 대목이다.

먼저 불감이 말했다. “아름다운 봉황이 붉은빛 노을 하늘에서 춤을 춥니다(彩鳳舞丹霄).” 이어서 불안이 말했다. “무쇠 뱀이 인적이 끊긴 황폐한 길에 가로 누워 있습니다(鐵蛇橫古路).” 마지막으로 원오가 말했다. “발밑을 보십시오(看脚下).”

세 사람의 답변을 다 듣고 법연 선사는 “우리 종문을 멸할 사람은 원오뿐이다”라고 했다. 선에서는 ‘억하(抑下)의 탁상(托上)’이라 하여 폄하하는 말이 오히려 칭찬인 경우가 많다. 법연 선사는 원오의 깊은 경지를 극찬한 것이다. 어째서 원오의 답이 가장 뛰어날까? 스스로 참구해 보라.

대오한 후 원오 선사는 각지의 사찰에 주석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운수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특히 건강부(建康府, 현재의 南京) 장산(蔣山) 태평흥국사에 있을 때는 몰려드는 수행승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천성 성도의 소각사(昭覺寺), 호남성 예주(澧州)의 협산 영천원(靈泉院), 호남성 담주(潭州)의 도림사(道林寺)에 있으면서 제자들의 요청에 응하여 ‘설두송고’를 제창(提唱, 선적인 설법)했다. 이것을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 ‘벽암록’이다. 그의 나이 40대 초부터 ‘설두송고’를 제창한 것으로 보인다.

원오 선사는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등 걸출한 선승 100여 명을 배출하여 임제선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튼튼히 했다. 후대에 임제종 양기파가 선종 오가칠종 중 가장 번성하게 된 것은 실로 원오극근 선사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 힘의 중심에 있는 것이 ‘벽암록’이 아닐까? 예리한 선기(禪機), 끈질긴 분별을 단숨에 끊어 버리는 천금 같은 한마디에서 이 ‘벽암록’을 앞서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벽암록’은 시대를 바꾼 책이었다.

‘벽암록’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선에서는 말이나 문자에 사로잡히는 것을 비판한다. 보조 선사(?~?)는 1128년에 쓴 소각 전의 ‘벽암록’ 서문에서, ‘벽암록’의 내용을 흉내 내어 깨달은 척하는 사이비 선승들이 출현할 것을 우려하여 이렇게 경고했다. “말이나 문자에 얽매인다면 필시 부처의 명맥이 말살될 것이다.” 그러나 보조 선사가 우려한 대로 입으로 이 책의 내용만 외우는 이들이 많아 대혜 선사에 의해 소각되는 비운을 맞았다.

소각 후 약 150여 년이 지나 복간된 ‘벽암록’의 서문에서 삼교노인도 선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이 책이 세상에 다시 유포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깊다. 그러나 만약 물을 보고 바다인 줄 알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한다면, 이는 대혜 선사가 걱정하는 바일 뿐 아니라 원오 선사도 이런 속박을 끊으려 할 것이다. 옛사람이 그린 초상화에 붙여진 찬시에, ‘분명하구나, 종이 위에 그려진 장공자(張公子)여!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네’라고 씌어 있다. 이 책을 간파하려면 먼저 이 말의 의미를 잘 살펴라.”

물거품을 바다로 오인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손가락을 달이라고 착각한다면 또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는가? 진리를 설하는 말과 문자는 물거품이고 손가락이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벽암록’의 문자에 현혹되어 마치 자신이 깨달은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 속의 장공자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형해에 불과하다. 훌륭한 사상이나 개념도 체험이 없으면 그림 속의 장공자일 뿐이다. 삼교노인은 살아 있는 장공자를 만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벽암록’을 읽고 그 내용이 기존의 언어 체계로 정리·안치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그림 속의 장공자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림 속의 장공자는 아무리 많아도 생사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벽암록’의 문자를 통해 기존 머릿속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말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 다시 말해 ‘벽암록’의 말로써 켜켜이 눌어붙은 머릿속의 언어 습관들을 깨끗이 청소할 때 진정 살아 있는 장공자를 만나는 체험을 한다.

애초에 ‘벽암록’은 선 수행 지침서로서 찬술되었고, 간화선 최고의 교본으로 평가 받으며 읽혀져 왔다. 지금도 선 수행자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불후의 공안집이며, 선을 지도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다른 선 문헌처럼 ‘벽암록’에 대해서도 종교나 문학, 언어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책을 참선의 공안집으로 읽고자 한다면 위에서 말한 보조 선사와 삼교노인의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오 선사의 수제자인 대혜 선사가 ‘벽암록’을 불태우면서까지 말이나 문자에 매이지 말라고 훈계한 탓인지, 원오 선사가 붙인 착어(공안과 송의 각 구절에 붙인 짤막한 코멘트)나 평창(공안과 송에 대한 해설)은 되도록 건너뛰어서 읽는 경향이 있다. 그 내용이 난해할 뿐만 아니라 송대의 속어와 구어를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점도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원오 선사의 수시(각 공안의 서문)·착어·평창에는 당시의 속어와 구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벽암록’에서 착어와 평창을 빼면 그것은 이미 ‘벽암록’이 아니고 ‘설두송고’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종 제일의 서책이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벽암록’을 능가할 만한 선서가 없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그 착어와 평창의 뛰어남 때문이다.

‘벽암록’의 착어와 평창에는 원오극근 선사의 탁월한 선기(禪機)가 드러나 있다. 특히 그의 착어는 선 수행자들의 선기에 불을 붙여 간화선 수행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대단한 폭발력이 있다. 또 평창을 읽으면 원오극근 선사의 제창(提唱, 선적인 설법)을 직접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구체적이고 친절해서 본칙의 화두를 참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앞으로 연재할 글에서는 지금까지 간과되어 왔던 ‘벽암록’의 착어와 평창을 중심으로 올바른 화두 참구 방향을 제시하고, 원오극근 선사의 촌철살인적인 선기를 통해 말에서 해방된 대자유를 직감으로 느낄 수 있도록 열과 성을 기울일 것이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