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背水의 진鎭’이었다.
스스로 퇴로를 끊고 물러섬 없는 싸움에 나를 세우는 결단. 대자유를 향한 참구에 일생을 바친 장휘옥(63세) 원장은 말한다. 시지프스를 아느냐고. 끊임없이 끌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돌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 아니라 하루하루 순간순간 무심의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깨달음의 현현이라고,
형형한 눈빛으로 바다를 응시하며 그는 말한다. 불안장애와 자살 시도, 불교학과 학사편입과 일본 유학, 돌연 대학 강단을 떠나 통영 앞바다 작은 섬에 수련원을 열고 뼛속 깊이 화두를 새기며 간화선 수행에 매진한 한 평생. 이제 오곡도의 해상海上 무문관無門關에서 수행을 지도하며 자리이타의 삶을 펼쳐가는 그를 만났다.
| 크게 자르면 크게 열린다
: 오곡도 폐교를 손수 다듬어 지으신 명상수련원과 한려수도의 풍광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망설임 없이 교수직을 내려놓고 섬으로 오신 지 13년째에 접어듭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크게 자르면, 크게 열리는 법입니다. 드셔 보세요(방울토마토를 권하며). 여름내 먹었는데 참 연합니다. 이것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가지가 무성하게 올라오고 가지마다 열매가 많이 달립니다. 그대로 두면 열매가 더 크질 못해요. 가지치기를 해서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곳에선 눈 뜨면 예불로 시작해서 좌선과 울력으로 하루를 삽니다. 오후에는 밭에 가서 내내 엎드려 있지요. 해 지면 밥 먹고 예불하고 또 좌선하고. 손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우리 하루 용량만큼 일합니다. 하루를 내 한계만큼 사는 대신 게으름은 안 부려요.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수행자의 견장을 떼지 말자.” 아차, 하면 느슨해지니까요.
: 올해 초 나온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에 10대 시절 자살 시도를 비롯해 치열한 인생 역정을 가감 없이 풀어놓으셨는데요,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려서 불안장애로 자살까지 시도했다면 다들 못 믿습니다. 그때 나이 열여덟이었지요. 방 청소, 책상 정리 말끔히 하고 수면제를 먹었어요. 사흘 만에 깨어났습니다. 죽음의 문턱을 밟고 와서도 여전히 답답했어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죽지 않나, 왜 사는가, 그게 풀려야 말이죠. 불안장애는 형체 없는 구속으로 조여 오고. 그러다 손에 잡힌 게 『법현전』입니다. 목숨 내놓고 망망한 사막을 건너는 구법 순례기를 읽으면서 ‘어차피 죽을 목숨, 제대로 써먹고 죽자.’하는 생각이 들었죠.
늦은 나이에 동국대 불교학과로 편입해 공부하다 나중엔 일본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눕지 않고 토막잠을 잤어요.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요. 급기야 척추에 화끈화끈 열이 나서 이러다 죽는 거 아냐, 하는데 지도교수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전생부터 이어져온 불가佛家의 인연이 너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을까, 온몸에 전율이 흘렀죠. 그날부터 뭔가 모르게, 무한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인연의 힘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방황도 했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기도 했지만 걸림 없는 자유를 찾겠다는,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어찌 달리 설명하겠습니까, 깊은 인연이라고 밖에는.
| 무심無心이 일하게 하라
: 세계의 수행처를 두루 체험하시고 중국 송대의 선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 임제종에서 2003년부터 간화선 수행을 해오셨습니다. ‘운수납자의 목숨 재촉’이라 불리는 집중수행 ‘셋신’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일본 임제종 대본산 고가쿠지에선 안거 중 매월 1일이면 7일 동안 집중수행을 해요. 이때엔 하루 1시간 잡니다. 좌선하다 졸기라도 하면 각목 같은 죽비로 펑펑 내려치죠. 아주 간담이 서늘합니다. 겨울에도 선방엔 불기 한 점이 없어요. 문이고 창문이고 죄다 열어 놓고 맨발에 얇은 승복 하나로 버팁니다. 손발 동상쯤 대수롭지도 않지요. 추위보다 무서운 건 독참(獨參,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로 만나 나누는 선문답)입니다. 호랑이 같은 방장스님과 독참을 하루 다섯 번 합니다. 내보일 게 마땅치 않으면 이보다 더한 수모가 없어요. 호되게 야단맞는 게 일이죠.
방장스님과 독참하고 오곡도에 돌아와 사무치게 참구하고 그러기를 몇 해째,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무無’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 왔어요. 내 몸은 사라지고 없는데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순간에 공존하더군요. 화석이 된 패총의 조개껍데기들은 내 몸의 세포 같고 그것이 온 우주로 무한히 이어져 있는, 형용하기 힘든 경이로움이었습니다. 며칠을 살 떨리는 감동 속에 살았죠. 내 전공이 화엄인데 부처님의 깨달음 경지를 설한 것이 화엄입니다. 교리로만 배우고 가르쳤을 때는 절반의 불교였어요. 이젠 다시 한다면 설명이 다를 겁니다.
: 선禪에서 말하는‘깨달음을 얻었다’는 경지는 무엇을 뜻합니까? 또한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지요?
깨달았다, 견성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선가禪家에선 선문답을 통해서 스승의 인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인가를 받았다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에요. 내가 스승을 모시고 임제록, 벽암록을 다 뗐다고 해서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있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됐다, 이제는 혼자서 갈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시작이라는 거예요. 수행을 해 가는 데 있어서 입구를 못 찾으니 거기까지 스승이 안내해준 겁니다. 문 없는 문에 들어와서부터는 중생 속에서 중생 구제를 해야 해요. 자리自利에서 이타利他가 나오고 둘이 하나가 돼야 완성이 됩니다.
‘시지프스의 돌’을 아시지요? 올려놓으면 또다시 떨어질 줄 아는 그 돌을 시지프스는 끊임없이 끌어올리잖아요. 화도 내지 않고, 해태심을 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 일에 대한 타당성을 찾지도 않고. 서양철학 쪽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로 표현하는데 선에서는 그게 아니죠. 무심無心입니다. 걸리는 바 없이 무엇이 주어져도 주어진 그대로 하는 것, 이유 달지 않고 자기 할 일 무심히 하는 그것, 얼마나 멋집니까! 누굴 가르친다, 돕는다는 생각도 없이 저절로 자비의 화신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깨달음 이후의 삶입니다.
: 일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악성코드(컴퓨터 시스템에 피해를 입히는 악의적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어요. 사소한 일에서 못 헤어나고 지나간 과거 붙잡고 있는 게 다 악성코드지요. 이것을 포맷시켜 본래의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 선입니다. 악성코드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들어 있는데 수행하면 그 종자를 없애는 단계가 나옵니다. 깊이 수행하지 않으면 그게 기억의 창고 저 밑바닥에 없는 듯이 들어 있다가 어느 날 또 나타나죠. 원래가 그렇습니다.
선을 왜 하느냐, 잘 살기 위해서 아니겠어요? 내가 살고자 하는 삶 말입니다. 이 생에 태어나서 내 삶을 내가 쥐고서, 한 판 멋지게 살아야지요! 악성코드는 포맷해 버리세요. 그 관점에서 일상을 살면 삶의 평안이 찾아올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