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많은 인연들과 연락이 끊긴 지도 10여 년.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김사업의) 고등학교 동기생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 내용은 이랬다. 나와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어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 친구가 사진 한 장을 건네주며 이 세상에 자신이 없더라도 이 사진을 잘 부탁한다고 해서 받았다. 두 명의 청춘을 찍은 사진이었다. 대학 시절의 어느 여름날,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 내가 계곡의 개울가에서 웃통을 벗은 채 쾌활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이야기를 아무래도 나에게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는 내용이었다.
| 몰라서 공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았다. 학창 시절 별생각 없이 불렀던 노래 하나가 가슴 속을 맴돌았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네.
- 조용필의 ‘친구여’
이 노래는 내 귓전을 울리고 티 없이 맑은 창공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예불 시간 때마다 친구의 명복을 기원했다. 그러던 1주일 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더니 뜰 앞의 은행나무는 한순간에 이파리 하나 없는 완전한 나목이 되었다.
은행나무는 좋은 것도 놓아 버리고 싫은 것도 놓아 버리고, 옳다는 것도 그르다는 것도 다 놓아 버렸다. 사람들이 붙인, ‘은행나무’니 ‘장관’이니 ‘나목’이니 하는 수많은 이름표도 떨쳐 버렸다. 만사를 떨쳐 버리고 찬 바람 속에 당당히 서 있는 은행나무의 저 깊이를 아는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바로 그런 세계다.
영애와 순이는 어릴 적부터 같은 마을에 살았다. 이 마을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시골이었다. 영애의 집안은 대대로 그 지역의 유지였으며, 재산도 풍족했고 오빠들도 모두 출세하여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반면에 순이는 홀어머니 슬하의 외동딸이었다. 몇 평 되지 않는 논밭을 어머니가 홀로 일구어 생계를 이었기에 순이의 가슴 한구석은 늘 주눅과 가난이라는 멍이 퍼렇게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같은 반이던 두 사람은 졸업 후 함께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영애는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였고, 순이는 공장에 취직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사는 영역이 달랐기 때문이었는지 그 후 30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우연히 연락이 닿아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 호텔의 커피숍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영애가 약속 장소에 20분 먼저 도착했다. 마침 근처에 볼 일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일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순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길이 막혀 조금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차를 마시고 있으라는 연락이었다. 영애는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감미로운 커피의 향과 맛, 수준 높은 생음악 연주, 영애는 오래간만에 안락함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 후 웬 중년의 귀부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영애에게로 걸어왔다. 처음에는 몰라보았지만 자세히 보니 순이의 옛 얼굴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순이의 옷차림은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고가품이었다. 30년 만에 만나 반갑기는 했지만 왠지 심사가 편치 않았다. 영애는 대학 졸업 후 곧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과의 불화로 10년 만에 이혼을 하고 혼자서 사업을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아들 둘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속만 썩였다.
커피 잔을 드는 순이의 손에는 명품 다이아몬드 반지와 시계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뒤부터 영애에게는 커피의 감미로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이는 같은 공장에서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얼마 후 자신들의 공장을 차려 독립했다. 친절과 성실을 밑천 삼아 둘이서 일심동체가 되어 열심히 일했던 덕분인지 공장은 번창을 거듭해 갔다. 아들은 판사로 있고, 딸은 대학교수로 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영애에게는 더 이상 생음악 연주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영애가 순이와 나눈 대화는 건성에 지나지 않았다. 영애의 마음은 반복되는 울화와 한탄에만 빠져 있었다. 눈앞에 순이가 있었지만 정작 영애가 만나고 있는 것은 순이가 아니었다. 영애는 자신의 번뇌와 만나고 그 번뇌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애의 마음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눈앞의 순이인가, 영애 자신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순이 때문에 내 마음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좀 아는 사람이 이 질문을 받게 되면 나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며칠 후에는 또다시 ‘너 때문에’로 돌아간다.
당신이 영애이고 똑같은 상황에서 순이를 만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 색즉시공, 즉 ‘색은 곧 공이다’를 이해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안다. 나목이 된 은행나무처럼 옹색한 과거의 이름표를 모두 떨쳐 버리고 그냥 순이를 순수하게 만나야 하며, 과거의 순이와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순이와 나누는 대화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되는가? 머리는 이래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머리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학창 시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공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 않는가?
| 화두를 든다는 것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1813-1855)는 이런 실제 사례를 말한 적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훌륭한 책을 낸 사람이 있었다.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그는 매우 힘든 시련을 겪게 되었으며 깊은 의혹 속을 헤맨 끝에 목사 한 분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목사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의 하소연을 다 듣고 목사는 책 한 권을 권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을 읽고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은 구원될 길이 없는가 봅니다.” 목사가 권한 책은 목사에게 가르침을 청한 바로 그 사람이 저술한 책이었다.
구원에 관한 저명한 책을 쓸 정도로 구원에 해박한 사람도 결국 구원을 얻을 수 없었다. 우리가 대학 강단을 떠나 오곡도로 들어온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식대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분석ㆍ정리하여 색즉시공을 이해했다고 해서 색즉시공의 경지 그대로 살 수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해는 이해일 뿐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몰랐던 것을 처음 이해했을 때 환희를 경험한다. 그리고 장밋빛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그 환희와 기대는 오래 가지 않는다. 한번 맛보았던 그 달콤한 경험을 또 한 번 더 맛보기 위해 같은 일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과연 기대를 갖고 반복한다고 해서 처음의 환희를 또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행동은 결국 집착의 수렁에 발을 담그는 것이며 색즉시공과는 거리가 멀다.
역대 전등의 수많은 선사들이 불교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가 없어서 선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한계를 통절히 깨달았기에 그들은 선의 문을 두드렸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영하의 겨울날, 불기 한 점 없는 차디찬 선방에 앉아, 수행하다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화두를 드는 자의 심정을 아는가?
당나라 때의 황벽(黃檗希運, ?-?) 선사는 이렇게 일갈했다. “화두의 빗장을 열기란 매우 쉬운 일이건만, 그대들이 죽을 각오로 수행하지는 않고 오로지 ‘어렵다, 어렵다’라고만 한다. … 이것이 매우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지 마라.” 힘들기 때문에 다른 쪽을 모색하거나 능력 부재를 타령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바르고’ ‘제대로’ ‘철저하게’ 화두를 들어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색즉시공에서는 ‘나와 너’ ‘옳음과 그름’ 등으로 이리저리 나누고 후벼 파는 분석가의 입장이 죽는다. 부여잡고 있던 결론과 견해도 죽는다. 이렇게 어디에도 눌러앉는 바가 없기에 마음은 늘 새롭고 투명하며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만사에 대한 창조적인 행동이 여기서 나온다.
화두는 분석가의 입장이나 기존의 결론과 견해로는 통과할 수 없는 관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인간이 생각을 하는 것은, 생각하고자 하는 의욕이 고양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차라리 쇼크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진실한 의미에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종전의 경험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종전의 경험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상태다. 화두話頭란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알 수도 없고 풀리지도 않는 일종의 시험 문제다.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 둘을 구분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화두는 부처님이나 깨달은 선사들의 특별한 말씀이나 행동을 뽑아 놓은 것이다. 화두에는 진리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으나,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수행자는 이 알 수 없는 화두를 직접 참구하여 뚫어야 지혜를 얻고 깨달음에 이른다.
화두를 뚫고자 가부좌하고 앉아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좌선坐禪이라고 한다. 화두를 처음 참구해 보면, 지금까지 습득한 지식이나 앎으로는 꽉 막혀 뚫을 수 있는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 마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절벽을 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계속 참구하다 보면 불현듯이 화두는 뚫리고 깨달음을 얻는다.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화두를 든다’고 한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화두를 기존의 내 생각과 사고방식대로 짜 맞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내 생각과 사고방식을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화두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화두,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일념으로 아무런 조작 없이 그것에 사무치는 것, 화두를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때 에너지의 어떠한 분산과 낭비도 없다. 천지를 뒤덮는 화두 일념의 상태는 바로 색즉시공의 상태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거울. 거기에는 온갖 것이 비춰져도 잔상이 남지 않는다. 잔상이 남지 않기에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비춘다. 아름다운 얼굴이 비쳤다 해서 그것을 잡아 두려 하거나, 흉한 얼굴이 비친다 해서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잔상이 없는 거울에게 그것은 이미 아름답거나 흉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것이고 그것이 전부다. 결코 과거의 미추美醜의 잣대로 비교되거나 분석되지 않는다. 무엇이 비치든 거울은 그것에 물들지 않고 항상 청정하다.
이 거울과 같은 상태가 색즉시공의 경지이고, 화두 일념의 상태다. 이 상태의 끝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인 지혜의 작용이 저절로 용솟음쳐 나온다. 이것이 곧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지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의 경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공즉시색을 알 수가 없다. 개념으로 듣고 기존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중생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색즉시공의 경지에 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 당신은 누구를 만나는가?
공즉시색을 말하기 전에 영애와 순이의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우리는 가정과 직장에서 숱한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사실은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앞에는 배우자가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때 눈앞의 배우자를 만나고 있을까, 배우자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만나고 있을까? 진정 그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그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경지 높은 선승이 제자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어느 마을 앞 개울가에 이르렀을 때, 한 처녀가 개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까닭인즉, 비가 많이 와 개울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승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처녀를 업어서 개울을 건네주었다.
그 뒤 제자는 길을 걸으면서도 스승이 여인을 업은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참다못한 제자는 스승에게 물었다. “출가한 몸으로 어떻게 여인을 업을 수 있습니까?” 스승이 말했다. “이놈아, 너는 아직까지 여인을 업고 있느냐? 나는 개울을 건네준 순간 그 여인을 내려놓은 지 이미 오래다.”
선승은 지금 개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고, 제자는 ‘처녀’에 얽힌 자신의 생각을 만났다. 선승은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때 그 상황에서 새로운 그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제자는 여전히 ‘처녀’만 만난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겠는가?
병신년 새해가 밝아 온다. 새해 벽두에 군더더기 한마디를 보탠다. “정신 차리자. 죽음이 눈앞이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