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 새해가 밝으니 정겨운 사람들이 새해 인사 메일을 보내왔다. 그중에는 오곡도 수련원 집중수련회에 오래전부터 참가하여 수행하다 지금은 가정일로 잠시 참가를 쉬고 있는, 직장을 가진 40대 주부가 장휘옥 원장에게 보낸 편지도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 호의 글은 김사업이 썼다.)
밤 10시 15분. 정신은 더 또렷해집니다.
인디언의 한 부족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근 두 달 동안 마음에 짐이 되던 일을 지금 끝내고 나니,
먼 골짜기, 별이 마음에 들어와 빛나고 있습니다.
오래전, 석양이 가까워진 오곡도 법당 뒤 밭에서 뼈마디가 느껴지는 원장님의 긴 등을 뒤에서 안아 드렸던 그때처럼 원장님이 보고 싶어 코끝이 찡해집니다.
“누굴 주려고 이렇게 힘들게 밭일을 하십니까?”라고 제가 여쭈었습니다.
원장님, 저는 누굴 위해 이 시간에 남아 일을 할까요? 순간순간에만 매진해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이렇게 중생 생각으로 살라치면 어김없이 원장님이 보고 싶습니다.
참, 원장님은 멀리도 다녀가십니다. 이곳은 춘천에서도 1시간 30분은 더 와야 하는 먼 곳인데…. 원장님은 오곡도에 앉아 계셔도 삼만 리, 구만 리 길을 이렇게 단숨에 제게로 찾아오십니다.
이만 퇴근해야겠습니다. 가는 길에, 별은 다시 올려 보내겠습니다. 강녕하시기를 손 모아 기원 드립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의 부군은 몇 해 전 사고를 당했다. 기술자로서 8m 높이의 공중 구조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크레인이 철제빔을 그 근처로 옮기고 있었는데 철제빔을 묶고 있던 사슬이 풀리는 바람에 부군은 철제빔에 맞아 8m 아래 지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고였다. 그러나 부군은 크게 다치기는 했으나 생명은 기적적으로 건졌다.
이후 17번의 수술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부인이 겪은 고통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수술비도 부족하고, 잠을 줄여가며 틈틈이 하는 고된 아르바이트로 다리는 퉁퉁 붓고…. 그러나 남편이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고마웠다.
부인의 간호와 정성은 극진했다. 하지만 때때로 밀려오는 무력감에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땐 장 원장에게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다고. 그때마다 장 원장은 호되게 나무랐다.
“선 수행을 제대로 했다면 잡념 없이 순간순간을 살 줄 알아야지.”
“남편이 살아 있는 것만도 부처님 가피라고 생각한다면, 괴롭다 힘들다는 생각은 왜 붙들고 있니?”
“지금은 무심의 마음으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 다 떨쳐 버리고 주어진 일을 단지 하기만 해라.”
부군은 지금 혼자서도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아 천성이 착하고 총명하여 요즘에도 저런 애들이 있을까 하고 주위의 부러움을 산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방학 때면 학자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편지 내용에서 주인공은 밤늦게까지 직장에 남아 일을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해야 할 사람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보이면 주인공은 집안일을 하듯이 소리 없이 그 일을 한다.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진 공의 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내 집안일이다. 편지의 주인공은 그렇게 매 순간을 잡념 없이 눈앞의 일에 몰입하지만 때로는 “누굴 위해 이 시간까지 남아 일을 할까?”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회의에 빠질 때마다 코끝이 찡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장휘옥 원장이다. 키는 크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장 원장이 힘에 부치게 밭일을 하는 것을 편지의 주인공은 여러 차례 보았다. 수련생들의 밥상에 올라갈 야채를 키우기 위해 석양을 등진 채 밭일을 하는 원장을 편지의 주인공은 뒤에서 응석 부리듯 끌어안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뼈마디가 느껴지는 원장의 긴 등이 무척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누굴 주려고 이렇게 힘들게 밭일을 하다 앙상한 뼈마디만 남았습니까?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내 피붙이를 위해서도 아닌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일하나?”라는 중생의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그녀는 장 원장이 너무나 보고 싶다. 이럴 때마다, 이토록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보면 그녀는 그 착한 심성 덕분에 남들이 갖지 못한 행복 하나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녀의 가슴 속으로 장 원장은 삼만 리 구만 리 길을 훌쩍 지나 단숨에 찾아온다. 그녀에게 장 원장은 중생의 마음을 녹이는 밝게 빛나는 ‘별’이다. 이 별을 가슴에 품고 그녀는 색즉시공의 세계를 회복한다. 이와 같은 별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그녀의 면목이 한층 더 탁월한 것은 별을 마냥 가슴에 붙잡아 두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퇴근길에 그녀는 별을 다시 올려 보낸다. 놓을 때 놓지 못하고 좋다고 해서 마냥 붙들고 있는 것은 이미 색즉시공과 거리가 멀다. 무소유의 마음에 의해 별은 다시 하늘로 가서 만인의 별이 된다.
별을 올려 보내고 군더더기 없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녀는 집에서 내일 아침 반찬도 준비하고 빨래도 할 것이다. 아무런 잡생각과 욕심 없이 인연 따라 해야 할 그것에만 몰두하는 반찬 준비와 빨래가 바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인 세계다.
| 공이므로 도리어 일체가 성립한다
요강으로 사용되고 있는 저것을 도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요강’이라 부른다. ‘요강’이라는 말은 같지만 범부와 도인에게 그 말이 의미하는 차원은 천양지차다. 범부에게 ‘요강’이라는 말은 자성으로서의 요강, 다시 말해 원래부터 요강이며 영원토록 요강인 요강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것을 요강 이외의 다른 것으로 사용하면 범부는 난리를 친다.
도인에게 ‘요강’이라는 말은 가명(假名, upādāya-prajñapti)일 뿐이다. 즉 그렇게 호칭될 수도 있는 조건에 의존한 임시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인에게 그것은 요강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향로가 될 수도 있고 물항아리가 될 수도 있다. 범부는 누가 요강을 ‘향로’라고 하면 화를 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하겠지만, 도인에게 그 말은 아무렇지도 않다. 범부는 말에 속박되어 있고 도인은 말에 자유롭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는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같은 질문에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할 정도로 말에 대해 자유롭다. 범부의 눈에는 서로 모순되는 대답이겠지만 그 진상은 선 수행을 해 보면 안다.
주의할 것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면서도 섣불리 도인을 흉내 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잔꾀로 도인의 말을 모방해 도인인 척 해도 금세 들통이 나 실소만 자아낼 뿐이다. 또는 자기 수준에서 액면 그대로 도인의 언어표현을 받아들인다면 독사를 잘못 잡은 것처럼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
“요강은 공空이다.”라는 것은 요강을 파괴하거나 없애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강을 고정불변의 자성自性으로 보는 집착을 끊게 하는 말이다. 요강뿐만 아니라 일체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때의 색은 오온의 줄임말로 간주)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요강은 공하기 때문에 도리어 요강일 수가 있다. ‘요강’이라고 불리는 저것이 만약 어느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한데 그것이 처음부터 요강으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에 대해 맨 처음으로 인식한 내용이 요강일 뿐인 것을 원래부터 요강, 언제 어디서나 요강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것이 양념 단지로 고정되어 있었다면 요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요강’으로 불리는 저것이 요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어떤 무엇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은 공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강뿐 아니라 갖가지 모습의 삼라만상이 생성하는 것도 바로 일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공하기 때문에 일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공하기 때문에 도리어 일체가 성립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공은 허무의 세계가 아니며 모든 사물과 현상은 공하기 때문에 성립한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때의 색은 오온의 줄임말로 간주), 즉 ‘공은 곧 색이다.’이다.
공을 체계화한 용수도 『중론』 제24장 「관사제품」에서 세상은 공하기 때문에, 요컨대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성립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자성의 공이 아니라 자성을 인정한다면 생멸 현상이나, 업과 그 과보, 심지어 불교의 교리조차도 파괴되고 만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 자성이 있다면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이 일체는 항상 그대로 있게 된다. 따라서 자연의 변화라든가 눈앞에 펼쳐지는 생멸 현상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불교의 기본 교리인 무상無常도 부정되며, 중생은 아무리 수행을 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과오도 범한다. 자성인 고苦와 번뇌를 무슨 수로 없앨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용수는 『중론』 제24장 제14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이 타당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타당하다. 공이 타당하지 않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타당하지 않다.”
| 공즉시색으로 가는 길
공을 생각할 때 두 가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공은 이론적으로는 무자성을 뜻하고, 실천적으로는 무집착無執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공을 실천하는 것이다.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것에는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실상은 고정불변의 요강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자성이기 때문에 요강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진실에 맞는 당연한 행동이다.
둘째, 공은 무자성無自性과 유작용有作用의 양면을 갖는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무자성의 공이기 때문에 세상만사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때문에 온갖 작용이 있을 수 있어 세상만사가 성립한다. 다음과 같은 선사의 게송이 있다.
하늘이 개니 해가 나오고(天晴日頭出),
비가 내리면 대지는 촉촉하다(雨下地上濕).
날이 개면 해가 나오고 비 내리면 대지가 촉촉하다. 인연 따라 무수한 작용이 일어나는 이 당연한 눈앞의 사실 속에 무자성 공의 진리가 관통하고 있다. 이것 외에 ‘부처’니 ‘도’니 하고 따질 필요가 있는가? 일이 있을 때는 군소리 없이 ‘그냥’ 일하고, 쉴 때는 만사를 잊고 쉰다. 이것을 아는 자는 지금 바로 이 자리가 항상 부증불감, 즉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요강으로 쓰던 용기를 깨끗이 씻어 꿀을 담아 주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는가? 공인 저것은 인연에 따라 요강도 되고 꿀단지도 된다. 공이 곧 색인 것이다. 자연물은 이와 같이 공즉시색 그대로다. 문제는 자연물에 있지 않고 항상 나에게 있다.
나는 요강이 곧 꿀단지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밤바다가 달빛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듯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라고 이름 붙여진 이것도 공하기에 인연에 따라 사장도 되고 경비원도 된다. 공즉시색인 것이다. 그러나 ‘사장’으로 호칭되던 내가 사업에 실패하여 새로 얻은 직장에서 ‘경비원’으로 불릴 때 나는 가슴 아파한다.
자연물은 공空한 그대로 작용한다. 그런데 나는 자연물의 공함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내 자신이 공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더더구나 힘들다. 이처럼 공이 나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로 다가오면 올수록 공은 수용하기가 힘들어진다. 모든 문제는 언제나 나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백만 명을 이기는 사람보다 자기 한 명을 이기는 사람이 최고의 승자라 하고, 선가에서 불도佛道를 배우는 것은 나(自己)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공이 되는 색즉시공의 길은 눈물겹도록 험난하고 길다. 모든 이파리를 하나하나 다 떨어뜨려 벌거숭이 겨울나무가 되듯이, 이것도 저것도 모두 놓아 버려야 한다. ‘나는 사장이다.’라든가 ‘저것은 요강이다.’라는 기존 생각에 계속 매달리거나 붙들려서는 안 된다. 자신과 사물에 대한 집착, 모든 명칭과 결론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색즉시공의 길 끝에서 공즉시색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한순간에 저절로 이루어진다. 색즉시공은 대사일번大死一番, 즉 한번 내가 크게 죽는 길이다. 본인이 자진해서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철저히 놓아 버리는 것이며,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죽는 것에 의해 도리어 모든 것이 참된 진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이것을 선에서는 절후소생絶後蘇生이라 한다. 공즉시색은 절후소생에 해당한다.
중생인 우리는 색즉시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공즉시색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과거의 내가 죽지 않고는 만물은 진실한 모습으로 되살아나지 못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