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본다. 마음은 항상 얻으려 하고, 몸은 늘 대가를 바라고 움직인다. 설혹 얻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해도 그것 또한 더 고상한 것을 손에 넣기 위한 자기기만일지 모른다. 이런 모습이 너와 나의 자화상은 아닐까?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지만 끝내 부인할 수 없는 자화상.

자화상이 이런 모양을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말나식에 있다. 말나식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선천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집착하는 마음이다. 단 한 찰나의 멈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각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지만 명확하게 “나! 나!” 하면서 집착한다. 심지어 숙면 중일 때도 말나식의 작용은 멈추지 않는다.

말나식을 발견한 것은 유식의 큰 공헌이다. 깊숙이 숨어 있는 암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암은 숨길 것이 아니라 암 그대로 보는 것에서 치유가 시작된다. 말나식은 유식에서 말하는 수행 5단계 중 세 번째 단계인 견도見道에서부터 그 작용이 멈추기 시작한다. 견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분별지無分別智, 즉 분별이 없는 지혜가 생한다. 쉽게 말해 번쩍하고 한소식하게 되는 것이다. 견도에서 이 무분별지가 생해야 말나식의 작용은 멈추기 시작한다.

따라서 견도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말나식의 아집我執 작용에 물들고 만다. 선행을 하더라도 ‘내가 했다’는 때가 묻어 자기도 모르게 보상을 바라게 된다. 번뇌가 묻은 선, 즉 유루선有漏善이 될 뿐이다. 유루에서 ‘루漏’는 무엇이 샌다는 의미인데 불교에서는 ‘번뇌’의 의미로 사용한다. 번뇌는 안이비설신의의 6근에서 새어 나오기 때문이다. 유루有漏는 번뇌가 있다는 뜻이고, 무루無漏는 번뇌가 없다는 뜻이다.

유루선으로는 세속적 행복을 얻거나 사후에 천상에는 태어날 수 있으나 해탈은 불가능하다. 말나식의 작용이 멈춰, 번뇌의 때가 전혀 끼지 않은 무루선無漏善을 행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견도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한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식에 따르면 중생은 다음의 5단계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다.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통달위通達位ㆍ수습위修習位ㆍ구경위究竟位가 그것이다. 이 중 세 번째 단계인 통달위를 견도라고도 부르고, 네 번째 단계인 수습위를 수도修道라고도 부른다. 이 5단계의 수행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가 오위五位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생각이나 말이나 육체적 행동 중의 어느 하나이며, 유식의 입장에서는 이 셋은 모두 식(마음)의 작용에 다름 아니다. 모든 행위는 일어남과 동시에 아뢰야식에 그 행위와 똑같은 성질의 종자가 심어진다고 앞에서 말했다. 

종자는 여러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그중의 하나가 신훈종자新熏種子와 본유종자本有種子의 구분이다. 수많은 윤회를 해 오면서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에 의해 심어지는 종자를 신훈종자라고 한다. 이와는 달리 본래부터 아뢰야식에 계속 있어 온 종자가 있는데, 이를 본유종자라 한다.

또한 종자를 유루有漏종자와 무루無漏종자로 구분하기도 한다. 유루종자란 번뇌 종자를 말한다. 무루종자는 완전히 청정한 지혜의 종자, 깨달음의 종자를 가리킨다. 유식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본유무루종자本有無漏種子’, 즉 ‘원래부터 있는 깨달음의 종자’가 있다.

선善종자는 선행 그 자체가 아니라 선행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아뢰야식에 있다. 기온이 알맞고 땅이 비옥해야 꽃이 피듯이, 여러 조건(衆緣)이 갖추어져야 선종자에서 실제의 선행이 생한다. 마찬가지로 본유무루종자는 완전한 지혜, 곧 깨달음이 될 가능성으로서 있다. 조건이 갖추어져서 본유무루종자에서 실제의 지혜가 생하는 단계가 견도이고, 바로 그 지혜가 위에서 말한 무분별지이다. 

본유무루종자가 무분별지로 생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그것은 견도 이전의 수행 단계인 자량위와 가행위에서 정법을 바르게 듣고 실천 수행한 결과로 심어진 선善종자들이다. 자량위와 가행위에서는 아직 말나식의 작용이 단절되지 않았으므로 이때의 선종자는 번뇌의 때가 묻어 있는 유루의 선종자이다.

이 유루의 선종자가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조건이 되어서 본유무루종자에서 무분별지가 생하게 되고, 이때부터 말나식의 작용도 소멸되기 시작한다. 본유무루종자가 무분별지의 씨앗이라면, 자량위와 가행위에서 심는 유루의 선종자는 이 씨앗을 싹트게 하는 토양ㆍ수분ㆍ양분 등과 같은 것이다.

유식에서는 우리의 번뇌에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전자를 구생기俱生起 번뇌, 후자를 분별기分別起 번뇌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번뇌가 구생기 번뇌라면,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거나 본인의 분별망상에 의한 번뇌가 분별기 번뇌이다. 말나식이 일으키는 번뇌는 모두 구생기 번뇌이다.

번뇌가 소멸되는 차원도 두 가지로 나뉜다. 번뇌의 싹만 잘리는 것과 번뇌의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되는 것, 이 둘로 구분한다. 전자는 번뇌가 억제되어 실제의 번뇌로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 번뇌 종자만큼은 아직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언제라도 번뇌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그 번뇌의 종자까지 완전히 소멸된 상태이다. 전자를 전문 용어로는 ‘숨을 복伏’ 자를 써서 ‘복’이라 하고, 후자를 ‘끊을 단斷’ 자를 써서 ‘단’이라 한다.

분별기 번뇌, 즉 후천적 번뇌는 자량위와 가행위를 거치는 동안 수행의 힘에 의해 억제되어 실제의 번뇌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종자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후천적 번뇌의 종자는 견도에서 무분별지가 생하는 순간, 단번에 소멸된다. 뜨거운 사막에서 수증기가 일시에 증발하듯이, 무루의 무분별지에 의해 아뢰야식에서 그 종자가 일시에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후천적 번뇌는 견도에서 그 종자까지 완전히 종식을 고한다. 

한편 구생기 번뇌, 즉 선천적 번뇌는 대부분 견도 이후까지 지속된다. 견도에서 생한 무분별지로 선천적 번뇌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 견도 다음에 있는 수습위, 즉 수도의 과정이다. 수도에서의 수행을 통해 소멸되어 가던 선천적 번뇌가 그 종자까지 완전히 없어지는 순간이 수행 마지막 단계인 구경위이다. 이때 부처가 된다.

구경위에서는 안식에서 아뢰야식까지의 8식이 완전하게 지혜로 바뀐다. 번뇌로 얼룩진 유루의 식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바뀌어 번뇌 한 점 없는 무루의 지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한다. 유루의 식識을 바꿔서(轉), 무루의 지혜(智)를 얻는다(得)는 뜻이다. 이 전식득지가 유식 사상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전식득지가 일어날 때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전오식은 성소작지成所作智라는 지혜로 바뀐다. 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라는 지혜로, 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 아뢰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로 각각 바뀐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은 바위처럼 견고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횃불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거센 바람에 횃불은 곧 꺼지고 다시 찾아온 암흑 속에서 망연자실 서 있다. 본유무루종자가 있다고 하나 엄동설한 굳은 땅에 묻힌 전단향의 종자처럼 싹은커녕 향기조차도 뿜지 못하고 있다.

위의 상황이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아닐까. 그러나 부처님과 역대 전등 조사들이 걸으신 그 길을 향한 염원을 저버리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발원하여 일어서서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때가 온다.

하늘은 비를 내린다. 이 비에 대지가 촉촉이 젖으면 땅속의 전단향 종자도 마침내 향기로운 싹을 낸다. 여기서 하늘은 부처님이고,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촉촉이 젖은 대지는 가르침에 따라 실천 수행한 우리들 마음이고, 전단향 종자는 본유무루종자이며, 돋아난 향기로운 싹은 무분별지이다.

유식의 수행 제1단계가 자량위이다. ‘자량資糧’이란 필수품ㆍ준비라는 뜻이다. 따라서 자량위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필수품을 쌓아 나가는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깨달음을 위한 필수품일까? 지혜와 복덕福德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지혜 자량’과 ‘복덕 자량’이라고 부른다. 지혜는 온 몸과 마음으로 진리를 꿰뚫어 아는 것이요, 복덕이란 복을 짓고 덕을 베푸는 것이다. 복덕은 자비행에 다름 아니다.

자량위에서는 불법佛法을 배우고 실천하여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혜의 종자를 하나하나 심어 가는 동시에, 다소 번뇌의 때가 묻어 있더라도 선행을 쌓아 나간다. 이 지혜와 복덕이 견도에서 무분별지가 생하게 되는 조건들이 된다. 유식에서는 이 자량위에서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의 단계를 설정해 수행해 나간다.

우리는 자량위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십주 등에 대해 언급하는 것보다 지혜와 복덕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복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필자의 간화선 스승이신 일본 향악사(向嶽寺, 일본 발음은 고가쿠지)의 다이호(大峰) 방장스님께서 20살을 갓 넘긴 새파란 수행승이었을 때다. 스님의 스승은 40대 중반이었고 그 스승의 스승은 80대의 노승이셨다. 절집에서는 스승의 스승을 노스님이라 부른다. 방장스님의 노스님은 당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선승이었다. 지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 연세에도 정기적으로 독참 지도를 하셨는데 제자들이 많다 보니 한 번 하면 서너 시간씩 쉬지 않고 할 정도였다.

노스님의 지도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제자들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좌선에 매진하였다. 다이호 스님의 스승은 40대 중반이었지만 그때까지도 노스님의 기척만 나면 언제 어디서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런데 손제자뻘인 다이호 스님이 시중을 들기 위해 노스님의 거처에 들를 때면 그렇게 자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방학 때 시골로 내려온 손자를 맞는 할아버지와 같았다.

그렇게 거처에 들를 때마다 노구의 노스님은 자상한 목소리로 손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덕을 쌓아야 한다. 덕을.” 행주좌와 화두를 들어야 한다가 아니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노선승이 손제자를 볼 때마다 한 말은 “덕을 쌓아야 한다. 덕을.”이었다. 이 말의 무게가 가슴에 다가오는가?

다음은 지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금강경』에 “일체의 상相을 여읜 이를 부처라 한다(離一切諸相, 卽名諸佛).”는 구절이 나온다. 『금강경』에는 여러 한역본이 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스님의 한역본이고 위의 인용도 이에 따랐다. 

중국 역경사에서 구마라집 스님과 쌍벽을 이루는 분이 현장(玄奘, 602?-664) 스님인데, 현장 스님이 한역한 『금강경』에는 위의 ‘일체의 상相’이 ‘일체의 상想’으로 번역되어 있다. ‘모습 상相’ 자가 아니라 ‘생각 상想’ 자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금강경』 산스끄리뜨 원본에 따르면 이때의 ‘상’에 해당하는 단어는 삼즈냐sam.jñā로 ‘생각 상想’ 자에 해당한다. 구마라집 스님은 의역의 대가이고, 현장 스님은 직역의 명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일단 “일체의 상을 여읜 이를 부처라 한다.”에서의 ‘상’을 삼즈냐, 즉 ‘생각 상想’의 의미로 새겨 보자. 상想이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오온에서 말하는 상이다. 오온에서의 상은 이미지(개념)를 형성하고 이름을 붙이는 마음 작용을 말한다. 구마라집 스님은 이 ‘상’이라고 하는 마음 작용 그 자체보다 그 결과로서 형성된 이미지와 이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모습 상相’으로 번역했을지 모른다. 

사실 중생에게 삼즈냐sam.jñā, 즉 상想이란 초연하면서도 중립적으로 이미지와 이름을 형성하는 마음 작용이 아니다. 중국 선종의 제3조 승찬(僧璨, ?~606?) 대사의 저작으로 알려진 『신심명』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취사선택의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 싫어하고 좋아하지만 않으면, 확연히 명백하다.(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취사선택만 하지 않으면, 싫어하고 좋아하지만 않으면 깨달음과 해탈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역으로 말하면, 중생은 좋고 싫은 것을 가려서 좋아하는 것은 늘 잡으려 하고 싫은 것은 항상 멀리하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맨다는 것이다.

『신심명』이 갈파한 위의 내용처럼, 중생은 자신의 선택 방향과 싫고 좋음에 따라 이미지와 이름을 만든다. 게다가 자신이 만든 이미지와 이름 그대로 세상이 그렇다고 오인해 버린다. 그렇게 오인된 이미지와 이름은 끈끈이처럼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그 결과로 이미지와 이름은 마음을 포승줄처럼 구속해 버리고 만다. 우리에게 삼즈냐는 이러한 성질의 이미지와 이름을 만들어 내는 마음 작용이다.

구마라집 스님은 이러한 삼즈냐의 작용보다도 삼즈냐의 작용에 의해 마음을 지독하게 구속하는 이미지와 이름을 부각시켜서 나타내고자 한 듯하다. 그래서 삼즈냐에 의해 형성되는 이미지와 이름을 ‘모습 상相’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이미지와 이름이란 어떤 것에 대해 자신이 파악한 모습相이기 때문이다. 집착된 이미지와 이름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면을 감안한다면, 문제의 ‘상’을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름을 붙여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 작용이나 그 결과로서 집착된 이미지와 이름’으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따라서 ‘상’이란 쉽게 말해 마음속으로 자신이 소중히 여기거나 언짢아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가치관이나 신념ㆍ이념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이름일 수도 있고, 사람 또는 물건에 대한 고착된 생각일 수도 있다. 배신감이나 미래에 대한 절망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좋고 나쁜 평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을 모두 다 여읜 이가 부처다. 이쯤에 오면 사람들은 상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런데 ‘상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상이다. 상에 대해 어떻게 하려는 것은 모두 또 하나의 상에 근거한 행위들이다. 따라서 상을 제거하려는 것 등은 상을 여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상을 여읠까?

우리는 나 자신 자체는 상과는 별개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상과는 별개인 ‘나’가 이런저런 여러 상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상을 제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에 의하면 ‘나’는 상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내가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나’이다. 따라서 상이 상을 만들고 형성하는 것이지 상과는 별개인 내가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상 덩어리인 ‘나’에 의해 인연에 따라 여러 상이 만들어지고, 그 상을 ‘상 덩어리인 내’가 바라보며 또 여러 상을 만든다. 상이 상을 보는 것이요, 내가 나를 보는 것이다. 

‘밉다’라는 상 그 자체가 나이고, ‘밉다’라는 상과 별개인 나는 없다.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자각했다면 ‘밉다’에 대한 긍정과 부정, 정당화와 비난 등 더 이상의 상을 형성하는 작용과, 긍정과 부정 등 양자 사이의 갈등은 멈춘다. 이때 ‘밉다’라는 상에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 ‘일체의 상을 여읜 부처’, 곧 참된 지혜의 길은 위의 제반 사항에 대한 혼신의 참구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오곡도 수련원 부원장.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ㆍ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김사업 부원장은 장휘옥 원장과 함께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